올해 봄 첫나들이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
포근한 봄 하늘이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한다.
겨울 동안 움츠려 있던 내 몸뚱이가 그러겠노라고 대답한다.
서울에는 박물관이 참 많다. 어디를 가볼까 하다 서울역사박물관이 눈에 들어왔다.
근처 경희궁도 구경하고 성곽도 산책할 겸 서울박물관을 택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서대문역 근처 맛집 검색 후 찾은 한식전문점 '연화'에서 11시 반쯤 점심을 채웠다.
반찬이 7가지인가 되는데 대체적으로 간이 셌다.
경희궁은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입장료가 없다. 다른 궁궐은 대인(만 25세~만 64세) 기준으로 1000원~3000원 정도의 입장료가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었다. 경희궁에 살았던 왕은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영조가 가장 오래 머물렀으며, 숙종부터 정조 즉위까지 경희궁은 최전성기를 누렸다고 한다.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면적 또한 절반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나마 숭선전과 자정전, 태령전 등이 복원되었지만 다른 궁궐보다 초라하긴 하다.
승전 전에서 궁중 연회 등 왕의 공식 행사가 이루어졌다고 하여 두루 살펴보았다.
일제 때 승정전을 인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에 남아있으며 사진 속 승정전은 복원된 거라 한다.
아래 오른쪽 사진은 승전 전을 뒤로하여 왕이 신하를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니 시야가 트여 좋았다.
자정 전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보았다.
태령전이라고 영조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다.
태령전 뒤에 기괴한 바위들이 있었다. 궁에 웬 바위인가?
본래 왕암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 때문에 광해군이 그곳에 경희궁을 짓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경희궁 구경을 마치고 나와 옆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을 향했다.
1층에서 한양 삼군영 군인가족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으며 서울 학교 100 기증 유물 특별전을 볼 수 있었다.
'한양을 지켜라' 전시전은 2021년 3월 21일까지 볼 수 있다고
마지막으로 사건 연대기(오른쪽 사진) 사진을 찍는데 하트가 보여 신기했다.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그것이 아닌가 싶었다. ㅎ
'한양을 지켜라' 전시전은 2021년 3월 21일까지 볼 수 있다고 하니 관람을 원하신다면 서둘러 보시길...
'서울 학교 100년'도 둘러보았는데 사진을 찍은 줄 알았는데 찍지를 못했다. 이그...
3층에는 조선시대부터 산업화된 고도 성장기까지의 서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타입캡슐 같은 터널을 여행할 수 있었다.
1 존은 조선시대의 서울
2 존은 개항, 대한제국기 서울
3 존은 일제강점기 서울
4 존은 고도 성장기 서울
조선의 수도가 동전 던지기로 정해졌다는 사실 아는가?
서울역사박물관을 다녀온 뒤 tv를 보고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었다.
조선이 새로 건국되자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바꾸었지만 불과 5년 만에 정종이 '왕자의 난'으로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되돌렸다. 조선이 건국된 지 12년이 지나도 수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자 태종이 결단을 내린다.
태종이 최후의 수단으로 꺼낸 카드는 '척전' 동전 던지기이다. 이후 말도 많던 수도 결정에 대한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4 존에서 고도성장기의 서울 모습을 보았다.
해방과 남북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서울 모습, 일자리를 찾아 서울에 인구가 몰리면서 생겨나는 판자촌과 대비되는 아파트들, 세운상가, 서초삼호아파트 등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나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던 청년 전태일이다.
고도의 산업화를 빠르게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하루 16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던 한국 노동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상과 혜택은 나누어지지 않고 오히려 가난으로 내몰리고 방치되었다. 하루 종일 일해도 하루 방세 내기에도 부족했다고 하니 말 다했지 뭐...
4층을 관람하고 있는데 중간에 해설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기록을 해야만 그 시대의 역사를 알 수가 있고 그 기록을 남겨 놓아야 전시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공유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 선수로 유명한 박지성이 아직도 일기를 쓴다며 박지성 유품들이 가치를 발현할 수 있을 거라는 뉘앙스에 말인 것 같았다.
4층에 찍어놓은 사진들이 별로 없어... 아쉽긴 하다.
역시 한 번에 많은 것을 담기에는 내 역량이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다음에 내 가족이 생기거든 찾아올까 싶은 서울역사박물관이지만 또 오게 된다면 달라진 풍경들로 얘기할 거리가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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